<김세일의 하키야사> 중랑천 스케이트장은 어디로 가고 4. 나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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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일의 하키야사> 중랑천 스케이트장은 어디로 가고 4. 나의 출생
  • 윈터뉴스코리아
  • 승인 2014.05.2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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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대학 시절 모습(우측 첫 번째)


나 김세일은 1948년 11월13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외과의사였던 김붕철씨와 차순옥여사의 4남 2녀 중 넷째였다. 형 둘과 누나, 남동생, 여동생이 각각 한 명 씩이다.
   이북에서 우리집은 비교적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6.25전쟁이 나고 1.4후퇴 때 우리 가족은 대부도로 피난했다. 낯설기만 한 대부도에서 국민학교(대부국민학교) 1년을 다니고 서울로 이주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창경국민학교를 다니게 됐다. 우리 집은 동숭동 근처 숭인동이었다. 
   아버지는 대부도에서 개업을 했다. 하지만 손님이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개업을 했으니 병원이 잘 될 리 없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남의 병원 월급의사로 일을 하셨다.   그래서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서울에 온 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외도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집을 나가버려 우리 집은 졸지에 아버지 없는 집안이 됐다. 한 때는 큰집에 얹혀살기도 했다. 큰아버지는 치과의사여서 넉넉한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금새 전셋집 생활을 해야 했다. 큰집도 식구가 많아 도저히 얹혀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공부를 잘했다.  창경국민학교에서 전교 10등에 들었다.   아버지는 정말 엄하셨다.    너무 무서워 대화하기조차 어려웠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는 공부만 해야 했다.
  그러나 5학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고,  가정이 평안하지 않으니 나는 밖에 나가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우리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1987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 온다.
   내 성적은 그때부터 추락하기 시작했다.  전교 10등은 고사하고 반에서 10등 밖으로 밀렸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할 때 경복중학교에 지원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래서 2차였던 광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이전 광성은 평양에서 최고 명문이었다.  광성 역시 6.25 이후 평양에 있던 학교를 서울로 옮겨온 바람에 경기,  서울,  경복 등 명문에 뒤지는 학교로 변했다.   하지만 이북 출신은 웬만하면 광성을 택했다.  '평양 제1고보'였던 광성이 내 모교가 된 것이다. 
   그 때 주변에서는 '가정이 어려운 학생이 덕수중학교에 가면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고 권해 동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런데 야간이어서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광성중학생이 됐다.  큰형이 이북에서 광성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명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학교 시절 나는 축구공을 사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는 형편이 좋지 않으니 축구공를 사주시지 못했다. 
   언젠가 내가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동안 우연히 어머니가 뒤에서 따라오셨다.  그걸 몰랐던 나는 작은 돌맹이를 발로 차면서 집에까지 왔다.  어머니는 뒤따라오시면서 내 행동을 다 보시고 나서는 아무 말없이 축구공을 사 주셨다. 
   나는 축구를 정말 잘했는데 인연을 맺지 못했다.  나는 공으로 하는 운동은 무엇이든 잘했다.  그래서 당구도 잘 치는 것 같다.  내 당구는 한 때 500을 놓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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