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일의 하키야사> 중랑천 스케이트장은 어디로 가고 5. 운명을 바꾼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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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일의 하키야사> 중랑천 스케이트장은 어디로 가고 5. 운명을 바꾼 마라톤
  • 윈터뉴스코리아
  • 승인 2014.06.0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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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하고 나니 나는 단번에 유명인사가 됐다.  

특히 아이스하키부 선배들의 입부 권유가 거세졌다.   나는 마라톤대회 전에도 방과 후에 아이스하키부 선배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당시 아이스하키선수들은 아이스링크가 없는 비시즌에는 베니아 판 위에 석필가루를 뿌려 미끄럽게 한 뒤 거기에서 연습을 했다.  아이스하키 선수가 아니었던 나는 베니아판 위에서 노는 게 좋았다.  지금은 사라진 모습이지만 베니아판 위에서 퍽을 움직이면 드리블이나 슛이 가능하다.  

내가 하키부에 들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를 하셨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학에 다니던 큰형이 지원군이 돼 줬다.  “광성에서는 아이스하키를 하는 것이 좋다”면서 나를 도와줬다.

아이스하키선수가 되기로 결정한 나는 어머니를 졸라 청계천에 나갔다.  그리고 중고스케이트를 구입했다.  지금도 스케이트는 국내산이 없으니 그 때도 외제였다.  굉장히 낡은 것이지만 내 스케이트가 생긴 것이다.

당시 스케이트는 퍽에 맞으면 젓가락처럼 휘어졌다.  그렇게 되면 경기 도중 밖으로 가지고 나와 고무(나무)망치로 두들겨 바로 잡고 다시 게임을 해야 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12월.  아이스하키의 시작이었다.  내 장비는 하나도 없었다.  야외 얼음을 타러 나가면서 선수생활이 시작됐다.  헬멧,  장갑,  보호대도 없이 스케이트가 달랑 전부다.  장갑도 산소용접을 할 때 쓰는, 약간 두터운 산업용 가죽장갑을 구해 사용했다.

처음에는 스케이트만 탔다.  퍽과 스틱이 굉장히 귀했기 때문에 아이스하키선수가 되었지만 장비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갔던 연습장은 도봉구 창동 한전 건물 뒤쪽의 논에 물을 대 놓은 천연빙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했지만 당시는 서울 외곽의 농촌이었다.   연습하러 갈 때는 내복을 두 벌씩 준비해야 했다.  얼음이 꺼져 내복이 젖으면 동상이 걸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비상용 옷이 필요했다.   

우리는 새벽 통금이 해제될 때 효제동 시외버스 정류장에 모여 출발했다.  전차로 통학을 하던 당시 우리집은 숭인동이었다. 9인승 버스를 타고 컴컴한 아침에 도착하면 달빛에 얼음을 찾아야 했다.  먼저 돌맹이를 던져 소리를 듣고 얼음의 강도를 확인하고 천천히 들어간다.  길가 쪽 얼음이 약했기 때문에 빠질 위험이 높아 몸무게가 제일 적은 내가 먼저 들어가 확인을 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눈을 감고 논,  밭에서 아이스하키를 배웠던 그 시절을 떠 올려 본다.    실내링크에서,  고급 장비를 갖추고 맘껏 얼음을 지치는 요즘 아이들이 부러울 것 같지만 나는 그 때로 다시 돌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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