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82년 뉴델리' 마라톤 금메달 김양곤과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 이용장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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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82년 뉴델리' 마라톤 금메달 김양곤과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 이용장의 조우 
  • 조영섭
  • 승인 2020.11.2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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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장 이용선 대한복싱 협회 형제 심판위원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얼마 전 필자의 체육관에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김양곤(한국체대)과 그의 전주상고 동창이자 40년 지기인 현 대한 복싱 협회 이용장(전주대) 심판위원이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방글라데시 국가대표 감독과 상비군 감독으로 활동한 큰형 이용선 과 형제복서로 유명한 이용장은 1977년 복싱에 입문, 1978년 전국체전 전북 선발전 코크 급 결승에서 송미가열에게 석연찮게 판정으로 패했지만 복싱 잠재력을 인정받는다. 

송미가열은 1977년 제7회 전국 신인대회 코크 급 우승에 이어 1978년도 제2회 김명복 배 우승에 이어 그해 전국체전에서도 우승 3관왕을 차지한 베테랑 복서였다. 이용장은 1979년 6월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 밴텀 급으로 출전했지만 첫판에 충남의 국가대표 지택림(한국체대)에게 2차 선발전에서는 전남의 국가대표 권현규(목포대)에게 각각 판정으로 패해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극심한 성장통을 딛고 분기탱천 한 이용장은 제60회 전국체전 일반부 밴텀급 결승에서 경남대표 김평국(경상대)과 초 접전 끝에 판정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라이트 플라이급 정승(전남), 플라이급 홍동식(부산광역시), 밴텀급 이용장(전북), 페더급 박기철(전남), 라이트급 김완수(전북), 라이트 웰터급 호계천(경기도), 웰터급 양설석(서울), 라이트 미들급 라경민(강원도), 미들급 이남의(전남), 라이트 헤비 임창일(경북), 헤비급 조주현(전북) 등이 12체급 금메달 주인공이다. 이용장이 결승에서 접전 끝에 신승(辛勝)한 김평국은 1979년도 제1회 세계 청소년 대표 선발전에서 유승기(한국체대), 임창용(동아대)를 잡고 우승을 차지한 사우스포 강타자로 동체시력이 출충 한 그는 복싱 신동 장정구(부산 극동)를 한차례 잡을 정도로 출충 한 실력을 보유한 복서였고 돌주먹 문성길 을 꺽은 김상수(대구 공고-동아대)를 미사일 펀치를 명중시켜 RSC로 격파한 하드펀처 였다 

이용장과 동행한 마라토너 김양곤은 전주상고 재학시절 3천m 장애물 선수로 육상과 인연을 맺어 한국체대에 진학해서는 5천m와 1만m 장거리 선수로 탈바꿈한 후 82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11위를 차지, 한국선수론 두 번째 좋은 기록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뉴델리 호에 극적으로 승선해 다른 종목 금메달 10개 와도 바꿀수 없다는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 한 것이다.

마라토너 김양곤과 이용장 심판위원(좌측부터)

섭씨 25도 습도 80도의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한 악천후를 극복하고 일본과 북한선수를 제압하고 걷어 올린 김양곤의 아시안 게임 재패는 실로 1958년 이창훈의 금메달에 이은 24년에 금메달을 획득한 쾌거였다, 손기정 서윤복 최윤칠 이창훈 으로 이어지며 마라톤을 주름 잡았던 한국 마라톤은 60년대 이후 뒷걸음만 계속 해왔던 종목이었다, 하지만 가뭄에 단비 같은 김양곤의 금메달이 나오자 1990년 김원탁, 1994년 황영조 ,1998년 2002년 이봉주, 2010년 지영준이 봇물 터지듯 금메달이 쏟아져 나왔고 시금석(試金石) 역할을 한 김양곤의 금메달은 상징성이 묻어난 메달이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인생을 복싱과 마라톤이라 정의했다. 

두 종목은 시작과 끝을 모두 자신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하는 공통점이 묻어있다. 홀로 걸어가는 험한 나그네 인생길같은  우리네 삶과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목적지를 홀로 투쟁하며 가야하는 고독한 종목인 복싱과 마라톤은 공통분모가 있는 듯 하다. 

필자 마라토너 황영조 문성길 챔프(좌측부터)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결코 서두르지 말라'라는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명언을 남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는 무사장구의(無事長久) 근원이요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진다고 말했다.

각설하고 우리나라 프로복싱은 현재 15년째 무관의 길을 걷고 있고 아마추어 복싱도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1954년 밴텀급의 김금현의 금메달 이후 44년 만에 노 골드로 전락한 이후 극심한 침체기를 동반으로 겪고 있다,

그런데 마라톤도 60-70년대 극심한 암흑기를 겪은 후 극복한 전례를 우리 복싱이 반면교사로 삼아 부활을 모색해 보는 것도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1974년 동아 마라톤 에서 문 흥주 가 2시간 16분15초 기록으로 우승한 이후 1979년 손 기정 마라톤대회 우승자인 유재성의 2시간 28분 27초의 저조한 기록을 양산해 낼 정도로 민낯을 보이며  뒷걸음친 한국 마라톤의 현실은 빛이 보이질 않는 어둠속의 터널 그 자체였다.

80년대에 들어왔어도 1974년 세운 문흥주의 기록이 7년째 기록경신이 이뤄지지 않던  1981년 10월 어느 날 뉴욕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려 미국의 알베르트, 살라자르가 2시간 8분 13초,  여자 최고 기록은 뉴질랜드의 엘리슨 로가 2시간 25분 29초를 기록, 우승한 기록을 상기시켜본 코오롱 이동찬 회장은 결단을 내린다. 1981년 11월부터 1988월 12월 말까지 마라톤 10분벽을 깨는 선수에게 1억원을, 15분 벽을 깨는 선수에게 5천만 원을 지급한다는 파격적인 반전카드를 꺼내든다. 성경말씀처럼 세상의 문은 두드려야 열린다.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마라톤 금메달 김양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 무려 24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 분위기를 반전시킨 주인공이 바로 김양곤이다. 탄력을 받은 한국 마라톤은 1984년 3월 18일 이 홍렬이 마의 15분 벽을 허물면서 10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마라톤 한국 신기록을 수립, 5천만 원을 수령했고 이동찬 회장이 창설한 1986년 제2회 구간 마라톤 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운 남원상고 김완기 에 이어 1988년 구간 마라톤 대회에서 적토마처럼 달리는 한 고교생이 샛별처럼 나타난다. 강릉 명륜고 2학년 황영조였다. 

이후 급성장한 황영조는 코오롱 팀에 입단, 92년 2월 2시간 8분 47초를 기록, 1억 원을 수령 후 용기백배하며 출전한 그해 8월 바로 셀로나 올림픽에서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손기정 옹이 일장기를 달고 획득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갈증을 56년 해갈시키면서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때까지 이동찬 회장이 투자한 금액이 물경 40억을 상회 했다. 정봉수 감독은 말한다, 상금을 많이 내건 대회가 마라톤 저변확대에 지름길이라고... 

조선 창업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은 삼봉 정도전이다. 그리고 그 밑그림 위에 채색을 한 사람이 태종 이방원이고 낙관을 찍어 완성 시킨 분이 세종대왕이라면 한국 마라톤은 이동찬 코오롱 회장이 밑그림을, 정봉수 감독이 채색을, 황영조 가 낙관을 찍으면서 한국 마라톤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인간이 현명해지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고 경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 복싱도 마라톤 부활의 선례를 현명하게 학습하여 부활의 전환기를 맞이 할 때가 작금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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