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헤라클레스 강흥원과 세계챔프 박종팔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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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헤라클레스 강흥원과 세계챔프 박종팔의 조우
  • 문정환
  • 승인 2020.11.2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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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 강흥원과 세계챔프 박종팔(우측)
헤라클레스 강흥원과 세계챔프 박종팔(우측)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며칠 전 동대문구 제기역 인근에 있는 경동시장에서 흥원 인삼 가계를 운영하는 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 강흥원 선배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으로부터 43년인 1978년 6월 한국 미들급 타이틀을 걸고 맞대결을 펼쳐 1회 KO패 당한 박종팔이 인사차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은 필자는 많은 상념에 잠겼다. 그동안 박종팔을 만날 때 강흥원과의 지난 대결을 소재로 화두를 꺼내면 박종팔은 가슴 한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 우마 때문인지 바퀴벌레 씹은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던 지난날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문득 공자(孔子)는 논어 위정 편 에서 말한 60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순(耳順) 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한 내용이 생각난다. 즉 육십에 이르러서야 귀가 순해졌다는 의미이다. 

박종팔을 KO시킨후 트로피 를 받는 강흥원 선수
박종팔을 KO시킨후 트로피 를 받는 강흥원 선수

이순은 남의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경지요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깊이 이해하는 경지요 너그런 마음으로 모든 걸 관용하는 경지이다. 올해 62살인 박종팔은 환갑이 되기 전까진 강흥원에게 당한 상흔(傷痕)이 발목을 잡아서인지 귀에 거슬리는 말에 "아따 참말로 하지 말랑께!" 하며 경청하지 않는 성향이 짙은 복서였다. 

이런 전력이 있는 박종팔에게 필자가 말했다. "형님 강흥원 선배와의 악몽 같은 일전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40년 넘는 세월이 흘러 갔네요?" 라고 말을 던지자 "그래! 동상 말이 맞당께! 맞아"하면서 웃으며 화답한다. 이들이 맞대결을 벌일 때 29세의 베테랑 강흥원은 당시 20전 13승(7 KO승) 6패1무를 기록한 한국 미들급 챔피언 이었고 20살의 떠오르는 태양 박종팔은 77년 미들급 신인왕 출신으로 5전4승(3KO승)1무를 각각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 전문가들의 예상은 강흥원 이주호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이경복과 박남용을 꺾었을뿐 아니라 일본의 정상급 복서인 시바다 겐지나 피터 남보꾸를 한방에 KO 시킨 실력은 인정하지만 30고개에 접어든 그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세로 치솟는 박종팔의 예봉을 피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지배적 이었고 타이틀을 양도하는 이임식(離任式)이 될거라 예상했다. 

복싱이던 인생이든 우리는 때론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 것을 알면서도 대담하게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하듯이 언더독인 강흥원이 그랬다. 공이 울리자 짙은 심호흡을 한번 내뱉은 탑독인 박종팔은 묵직한 양훅을 앞세운 선제공격이 펼쳐진다. 우박 처럼 쏟아지는 박종팔 의 공세에 침착하게 두터운 커버링을 한 체 관망하던 강흥원 은 종료 직전 커버가 열린 그의 안면에 침착하게 회심의 라이트훅 일타를 박종팔에 작렬시키자 박종팔은 총 맞은 노루처럼 푹 하고 쓰러지면서 경기는 끝이 난다. 경기후 박종팔은 경기내용을 전혀 기억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유제두와의 맞대결을 앞두고 트레이닝 중인 강흥원
유제두와의 맞대결을 앞두고 트레이닝 중인 강흥원

강흥원은 박종팔과의 경기가 끝난 6개월 후인 78년 12월 17일 문화체육관에서 동양미들급 챔피언 유제두 의 21차 방어전 상대로 내정되어 일전을 벌인다. 21전 13승(8KO승)7패 1무의 일천한 케리어의 그가 54전49승(29KO승)3무2패를 기록한 전 WBA Jr미들급 챔피언 유제두와 벌인 12회전 경기에서 치열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2ㅡ1 판정에 강흥원 은 고개를 숙인다. 강흥원의 파상공격을 유제두의 노련미로 극복하는 장면이 인상적인 경기였다. 이 경기 후 강흥원 은 결혼과 함께 사실상 복싱을 접는다. 

1979년 7월25일 유제두가 공식은퇴를 하고 그해 8월22일 유제두가 반납한 동양미들급 타이틀전 결정전에서 일본의 케시어스 나이또를 맞이하여 2회 1분55초 KO승을 거두고 그의 시대가 활짝 도래(到來) 했음을 선포한 복서가 바로 박종팔 이다. 박종팔 은 60년대 강세철 김기수 최성갑 이금택 70년대 유제두 임재근 주호 강흥원에 이어 80년대 백인철과 함께 중량급의 블루칩으로 자리 잡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복서로 탄생한다.

챔피언 유제두와 강흥원(우측)의 동양타이틀전
챔피언 유제두와 강흥원(우측)의 동양타이틀전

은퇴한 강흥원은 결혼과 함께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사업가로 반석위에 우뚝 선다. 1949년 전남 영광 출신의 강흥원은 1973년 당시 경동시장 노조 위원장인 친형인 강두원이 중산체육관 에서 복싱을 수련하던 강흥원을 위해 자신의 텃밭인 이곳에 자신의 친구인 복싱인 윤창수 (경희대)를 관장으로 선임하고 경동시장 과 강흥원의 이름에서 한자씩 혼합하여 경흥 체육관이라 명명하고 닻을 올린 명문 체육관이다.

이곳 체육관에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라이트 플라이급의 장흥민(한국체대), 밴텀급의  황철순(한국화약), 라이트급의 김인창(한국체대)등 이 선발전 우승과 함께 국가대표로 탄생하면서 일약 전국구 체육관으로 주목을 받은 경흥 체육관은 복싱 사관학교인 한국체육대학 에 김인창 장흥민 김종신 장한곤 김종원 등을 차례로 1회부터 5회까지 진학 시키는 등 학원스포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프로복싱 국내챔피언을 지낸 최영철 최만성을 비롯해 중견복서인 이필구 김종표 강인길 등을 쉼 없이 배출한 명문체육관으로 자리 매김 하면서 한국 복싱발전에 한축을 담당했다.

강흥원은 현역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대표적인 복서다. 특히 남양주시에서 덕현 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인창은 자신의 체육관에 선배 강흥원의 사진을 중앙에 상징적으로 걸어놓을 정도로 신망이 두텁고 현재의 아내인 황복희 여사도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인 장흥민이 만남을 주선해서 이들의 결혼을 성사시킬 정도로 그의 후배 사랑은 지극하다. 강흥원 과 친형제 처럼 지내는 장흥민은 79년 모스크바 올림픽 라이트 플라이급 선발전 준결승에서 후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장정구(부산 극동) 를 결승에선 충남의 한정훈(한국체대)을 꺽고 올라온 홍동식(동아대)에 판정승 올림픽 대표에 발탁되었는데 장흥민에 패한 장정구는 그해 전국체전에 부산대표로 선발됨에도 불구하고 부산협회에서 임의대로 장정구를 탈락시키고 지명도 높은 장흥민을 편법으로 합류시키자 분함을 참지 못한 10대 소년 장정구는 곧바로 프로로 전향, 그해 신인왕에 오르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간판복서로 성장한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 장흥민과 강흥원(우측)

여담이지만 장정구도 아마츄어 시절 국가대표 급 수준의 실력 이었다. 그가 소속된 부산과 경남 지역에 김재홍 (한국체대), 김상찬(한국체대), 안현문(동아대), 김평국(경상대) 등 국내정상급 복서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어 이들과 치열하게 경합하면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을 벌인 장정구는 실력이 시나브로 성장 하였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에머슨이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고 갈파 했듯이 장정구 에게 소중한 자극을 주어  프로복싱 챔피언을 만든 일등공신이 장흥민 이었고 박종팔 에 마음의 상처를 심어줘 극복 할수 있는 동기부여를 제공, 세계정상에 등극시킨 조력자는 강흥원 이었다. 복서로 활동하다 상처(패배)를 입다보면 자생력(自生力)이 강해지고 마음깊이 아문 상처는 그 고통을 당하는 복서에게 강인한 인내심과 불굴의 열정을 선물해준다. 이런 논리를 역설 적으로 설명하면 최대의 수혜자가 바로 장정구와 박종팔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이들은 불에 달군 쇠가 보다 단단해 지고 아문상처는 다른 곳의 살보다 더 굳고 단단해 지듯이 이들은 아픔과 고통을 성숙하게 극복하고 한국복싱 백년사에 경량급과 중량급을 대표하는 양대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원초적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네 인생사가 그렇듯이 사각의 정글 에서도 고통 없이 시련과 불행이 상존하지 않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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