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단장 '야구인' 조계현과 '복싱 국대' 김완수의 운명적 만남[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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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단장 '야구인' 조계현과 '복싱 국대' 김완수의 운명적 만남[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 조영섭 기자
  • 승인 2021.01.09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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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고 투수 조계현의 역투 모습
군산상고 투수 조계현의 역투 모습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복싱칼럼을 연재한지 6년여 세월이 흘렀다. 가끔씩 경기장을 찾으면 LA 올림픽 복싱 금메달 리스트인 신준섭 과 경북체고 복싱 감독인 곽귀근 교사가 한결같이 "이제 한번쯤 다른 사람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네 스토리 좀 한번 들려주는 건 어떠한가?"라는 말을 종종 내 뱉는다.

그러던 3년 전 전주에서 개최되는 소년체전에 방송 해설위원으로 파견된 필자는 현장에서 초,중학교 때 같이 야구부에서 5년간 선수 생활을 했던, 현재 농협에 근무하는 고장량이란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군산상고를 거쳐 원광대학에 진학 79년 팀 창단한 이래 86년 4월 봄철 대학리그에서 원광대학이 한양대, 건국대, 동국대를 연달아 꺽으며 우승할 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던 공-수-주 3박자를 겸비한 중거리 타자였다. 대학 졸업 후  88년 삼성에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상무에 입대, 90년 실업리그연맹전에서 4할 4푼 6리의 타율로 수위타자에 오른 후  그해 북경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번 이종범(건국대), 2번 유지현(한양대), 3번 박정태(경성대), 4번 김기태(인하대)에 이어 클린업 트리오인 5번 타자로 활약했던 선수가 바로 고장량이다. 상무를 전역한 고장량은 농협에 입단하여 91년에도 4할 4푼 1리의 타율로 실업리그 타격 2연패를 달성했는데, 이는 타격천재 장효조, 강기웅, 김재박, 이해창도 달성 하지 못한 초유의 기록이었다.

실업리그 최초의 수위타자 2연패를 달성한 고장량의 현역시절
실업리그 최초의 수위타자 2연패를 달성한 고장량의 현역시절

그가 삼성의 입단제의를 거절하고 실업팀(농협)에 남아 현역생활을 한것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삼성은 유중일, 강기웅, 김성래, 김용국, 김근석, 이종두 등 역대 급 출신들이 즐비한 내야진은 최고 수준의 멤버였고, 프로야구 원년부터 박승호, 배대웅, 함학수, 김한근, 서정환, 천보성, 오대석 등이 활약한 전통적으로 내야의 뎁스가 강한 팀이었다. 삼성의 원년 멤버중 대부분은 12년 전인 1970년 서영무 감독이 이끄는 경북고가 전국대회 5관왕을 휩쓸 때 주력 멤버였다.

얼마전 신문기사에 정명원이 프로야구 KIA 투수코치로 내정 됐다는 기사를 접하고 정명원과 KIA 단장 조계현, 고장량 등 옛동료들의 감미로운 추억이 스쳐지나갔다. 이들은 초, 중 시절 필자와 함께 어우러져 함께 그라운드에서 야구경기를 펼쳤던 옛 동료들이였기 때문이다. 이중 군산상고와 원광대를 거치는 동안 무명 중의 무명이었던 2년 후배 정명원은 89년 태평양에 입단, 김성근 감독과 신용균 투수코치의 조련으로 첫해 11승 4패 6세이브를 기록하며 7승9패를 기록한 입단 동기인 조계현을 앞섰다.

그해 신인왕은 19승을 올린 언더스로우 박정현(태평양)이 차지했다. 정명원은 94년에 최초의 40세이브를 기록하며 선동렬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또한 96년에도 태평양 소속으로 해태와 4차전 깜짝 선발투수로 등판, 포스트시즌 사상 최초로 노 히트 노 런을 기록하며 2승2패로 균형을 맞춘 투수가 바로 정명원이었다. 91년에는 쌍방울 타자 정학원(원광대)과 맞대결 하면서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형제대결을 펼친 주인공도 바로 정명원이었다.

앞줄 부터 장호익, 한경수, 조계현, 고장량, ​​​​​​​정명원, 필자, 이문희, 최봉규
앞줄 부터 장호익, 한경수, 조계현, 고장량, 정명원, 필자, 이문희, 최봉규

군산상고가 72년도 황급사자기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할 때 김일권, 김준환, 김봉연 등과 활약하며 편기철, 김일환이 공수에서 활약한 부산고에 5:4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때 스마일 피쳐로 명성을 날린 송상복이 당시 군산남초등학교 야구부 코치였다. 고교시절 어깨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고 문철웅 교사와 함께 그의 모교인 군산 남초등학교에 야구부원을 모집하기 위해 방문, 당시 필자가 속한 4학년3반(담임 백옥경) 교실에서 야구하고 싶은 학생들은 거수하라고 말하자 여러 명이 손을 들었는데 조계현과 백인호가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총54명이 모여 합류해서 야구수업을 받았고 많은 학생들이 모래알처럼 빠져 나간 얼마후 유니폼이 나왔다. 한 벌에 5천원 이었다. 당시 야구부 멤버로는 1번 한경수, 2번 조계현, 3번 장도영, 5번 남성문, 6번 김광현, 7번 이병휘, 8번 백인호, 9번 김재균, 10번 노택용, 11번 강동한, 12번 임동수, 13번 송상복, 14번 고장량, 15번 박성준, 16번 김민기, 17번 필자, 18번 김광태, 19번 상철규, 20번 김덕이 총18명이 당시 74년 재 창단된 남초등학교 야구부 멤버였다.

이후에 최양규, 최봉규, 방병국, 장호익, 이문희, 오영식 등 추가로 합류, 전력을 보강했고 2년 후배인 키만 껑충한 정명원도 이 무렵 박찬홍과 합류해 정식 일원으로 활약했다. 첫해에 김평호(해태), 강대호(동국대), 함종현, 함주현, 장일성, 고성훈, 조재율, 임동구(동국대) 등이 포진되어 전국 최강의 멤버로 구성된 군산 초등학교에 0:7 콜드게임 패를 당하는 등 성장통을 많이 겪을 당시의 투수는 김덕이(원광대), 포수 조계현, 유격수인 백인호(동국대ㅡ해태), 3루 고장량, 중견수 한경수 등이 초창기 핵심 멤버였다. 이듬해 익산 황등 남초등학교 야구팀이 해체 되면서 포수 장호익이 동료 선수인 이문희, 오영식과 함께 군산 남초등학교로 합류했지만 같이 동참하기로 했던 언더스로우 투수 이동석(동국대ㅡ빙그레)은 군산 초등학교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동석은 이후 정통파투수로 변신 동국대 졸업 후 빙그레에 입단, 2년차인 88년 4월 해태의 선동렬 과 맞대결 무사사구 완봉과 함께 국내에서 방수원, 김정행, 장호연에 이어 4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초창기 섬세하게 기본기를 지도한 송상복 코치가 이듬해 군 입대 하면서 황동호 코치가 공백을 메웠고 76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 운동장 야구장에서 개최된 첫 전국대회에 출전, 결승에서 조계현은 최양규와 배터리를 이뤄 충북 이수 초등학교를 1:0으로 잡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년후 백인호, 최양규 등을 제외하곤 대부분 유급을 하여 전국대회에 다시 출전. 장충 리틀구장에서 벌어진 결승에서 조계현은 장호익과 베터리를 이뤄 결승에서 충남 한산초등학교를 5:0으로 잡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우승 후 장충동 태평여관에서 짐을 꾸려 나오는데 인근 장충체육관에서 77년 8월 유제두 임재근 라이벌전이 펼쳐진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던 45년 전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함량미달인 실력 때문에 얼마 후 야구를 접었다. 5년동안 열심히 야구를 했지만 수비실력이 엉망이었고 매경기 실책을 저지르니 조계현이 "저녀석은 경기때마다 실책을 저지른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전라북도 대회에서 중앙초등학교와 군산초등학교 2연전에서 강육주, 장윤석 두 투수를 상대로 6타수 4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4타수3안타를 때린 군산초등학교 김현철 에게 타격 1위를 내줘 타격 2위를 기록한 것이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수 있는 유일한 야구 이력이다. 야구는 힘겨웠다 야구실밥이 108개인 것처럼 백팔번뇌가 끊임없이 날 어지럽게 했다.

76년  뒷줄 좌측부터 조계현 누님 모친 조계현투수
76년  뒷줄 좌측부터 조계현 누님 모친 조계현투수

야구를 접고도 조계현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다 조계현이 집과 우리집은 직선거리로 200m이내에 위치하고 있어 집에 TV가 없는 필자는 야구경기는 물론 복싱경기 중계방송을 하는 날은 수시로 그의 집에서 시청을 했기 때문이다. 계현이 부모님은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으로 당시 계현이는 6남매중 막내였다. 군산시청 호적계에 근무했던 부친은 기골이 장대한 분이였고, 모친은 참으로 자상한 인품을 지닌 가슴 따스한 분으로 고교시절 조계현 조카 장호와 함께 찾아가 뵙자 너는 권투하는데 왜 TV에 한번도 안나오냐? 라며 말씀하신 기억이 생각난다.

3년전 문성길 챔프와 함께 군산에 내려가 조계현 누님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 과거 조계현 모친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오래전 타계한 어머님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고교에 입학하면서 복싱에 입문했다. 그러던 1981년 여름 어느날로 기억된다. 동네 어귀에서 운동후 귀가하는 계현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중 당시 수경사 팀에 복싱부로 근무하면서 78년 베네주엘라에서 벌어진 세계군인선수권 대회 페더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완수 선배와 지나가기에 인사를 드렸는데 세상에 이런 인연이, 두 사람이 몇 달전 미국 땅 에서 만난 지인이였던 것이다,  

81년 7월10일부터 미국 오하이주에서 벌어진 제1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이 선동렬(광주일고), 이효봉(신일고), 김건우(선린상고), 김상국(북일고), 강기웅(대구고), 구천서(신일고), 김동기(인천고) 등과 함께  청소년 대표로 참가한 대회에서 공교롭게 미국에서 개최된 국제복싱대회에 수경사 일원으로 참가한 김완수 일행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 상봉을 했는데, 같은 군산출신이어서 더없이 정겨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고향 군산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복서 김완수는 군산을 대표하는 복서중 하나로 78년도 제2회 김명복 배(페더급)에서 군산체육관 동료복서 곽동성(원광대)과 동반 금메달을 획득한 경기를 필두로 아시아선수권과 대통령배 전국체전에서 싹쓸이 4관왕을 차지했고 특히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는 4연승(3KO승)을 기록 대회 최우수복서에 올랐었다. 김명복 배에서는 우승과 함께 당시 장학금 8만원을 지급받은 그는 갈대같은 유연성과 동체시력이 특히 뛰어난 복서였다,

79년 킹스컵 국가대표 곽동성과 세계 군인선수권 은메달 김완수(우측)
79년 킹스컵 국가대표 곽동성과 세계 군인선수권 은메달 김완수(우측)

1979년7월 제31회 세계 군인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서독의 노베르토 랑구토를 3회 RSC로 잡고 결승에 올라 홈링의 케사르 살라자르에 홈 텃세의 의해 분패 은메달을 획득한 복서겸 파이터 였던 김완수는 80년 대통령배 대회에 라이트급으로 월장 결승에 진출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인 강원대표 김인창과 맞대결, 비록 판정에 고개를 숙였지만 정상급 복서임을 과시했다. 현재는 오랜 교편생활을 접고 곽동성과 함께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프로복서 출신 홍수환과 함께 영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복싱인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상계동 백병원에 근무하는 82, 86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던 이해정(한국체대)은 이런 복싱인 들을 헬싱키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에 56년 멜버른 올림픽에 국제심판으로 참석한 주삼점처럼 국제무대에서 한국복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적극 활용해야한다고 말한다. 현재 김완수 대한복싱협회 심판은 동료복싱인 곽동성과 함께 교직에서 동반퇴진, 심판업무에만 여념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조계현과 김완수 선배가 만난 군산시 삼학동과 오룡동이 교차하는 그곳엔 작은 능선이 엄마의 젖가슴처럼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400m에 걸쳐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능선에서 야구선수 조계현, 정명원, 백인호, 김일권, 한경수, 박찬홍 등이 탄생했고 복싱에선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전진철과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 김광선을 비롯 66년 방콕아시안 게임 (웰터급)금메달 리스트이자 68년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인 박구일이 탄생한 지역임을 유추해보면 이곳은 스포츠의 성지(聖地)같은 곳이란 생각이 진하게 든다. 또한 전진철의 조카인 여자 복싱 국가대표 오연지도 아시아선수권 2연패,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도 이곳에서 기운을 받고 탄생 했다. 이 영험한(靈驗)한 명당터에서 탄생한 조계현을 비롯한 스포츠 스타들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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